시간 여행이 가능한 시계라는 설정으로 치매를 재해석한 <눈이 부시게>의 탁월한 통찰력은 여전히 대단함으로 다가온다. 이제 마지막 한 번의 이야기만 남겨둔 이 드라마는 70년대 25살 혜자와 준하의 행복했던 시절 이야기로 돌아갔다. 돌아가고 싶었던, 그 기억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봄날은 간다;
며느리 추억 담은 붕어빵과 기억 잃어가는 혜자
모든 것은 그저 꿈과 같은 시간들이었다. 혜자가 주웠던 바닷가 시계는 치매에 걸린 그녀에게 가끔씩 찾아오는 기억의 순간들일 뿐이었다. 시계가 조절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간헐적 기억들을 스스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흐를 뿐 혜자의 시간만 왜곡되어 흘렀을 뿐이었다.
70년 혜자에게도 아름답게 빛나는 날들은 존재했었다. 눈이 부시게 멋졌던 준하와 데이트를 하던 그 시절 혜자는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 행복했다.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준하와 데이트가 답답하기만 했던 혜자는 용하다는 점쟁이까지 찾아갔다.
현주, 상은과 함께 점쟁이를 만나러 간 혜자는 당장 내일 키스를 하게 된다는 말에 그저 즐겁기만 했다. 순간 점쟁이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그때는 생각지 못했다. 혜자의 운명이 어떻게 무너져 내릴지 용한 점쟁이는 순간적으로 봤으니 말이다. 현주와 영수의 관계도 예측하지만 그 역시 속세를 떠나지 않는 한 끊을 수 없는 관계일 뿐이었다.
가수로 성공하는 싶은 상은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다. 복희. 윤복희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후 앨범도 내고 유명한 가수가 되었으니, 용한 점쟁이의 말은 모두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혜자와 현주의 운명 역시 점쟁이의 말처럼 흘러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운명 역시 본인이 선택하고 결정한 것일 뿐이라는 점이다.
'키스 대작전'은 성공했다. 당시에는 존재했던 야간통행금지에 걸려 경찰을 피해 도망치던 둘은 골목에 숨었다. 그리고 그 미묘한 감정은 키스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입술이 퉁퉁 부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던 혜자는 친구들 앞에서 당당했다. 하지만 그 당당함도 1년 동안 그저 키스만 하는 관계에서 멈추자 다시 '프러포즈 대작전'을 준비해야 할 정도였다.
'보행위반단속' 데이트를 시작으로 '야간통행금지' 키스로 이어진 혜자와 준하의 완성형은 1박2일 여행이었다. 현주를 이용해 준하와의 달콤한 시간을 가지려던 혜자에게 복병은 오빠 영수였다. 영수가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떠난 여행에서 혜자는 준하에게 로맨틱한 프러포즈를 받았다.
언제나 혜자보다 느렸던 준하. 하지만 조용하게 그 때를 기다렸던 준하는 그런 자신의 마음도 모른 채 뿔난 혜자로 인해 강가에서 프러포즈를 할 수밖에 없었다. 프러포즈 반지를 끼워주며 결혼해주겠냐는 준하와 오래 전부터 그에게 주기 위해 산 시계를 끼워주는 혜자는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혜자의 프러포즈를 위해 함께 했던 영수와 현주는 이미 임신까지 해서 앞서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혜자와 준하 역시 부부의 연을 맺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았다. 혜자가 그토록 그 시계에 집착하는 이유는 시간여행이 가능한 기능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안에 준하의 마지막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현주와 복희가 혜자를 찾았다. 그리고 유명한 가수인 복희로 인해 한껏 즐거워진 혜자. 바지 안에 수많은 것들을 담고 다니는 할머니는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 손자들의 재롱을 받으며 행복해 보이는 그 할머니에게는 서글픔이 가득했다. 어머니가 살던 집을 팔고 요양병원으로 온 할머니를 찾은 아들들은 그 돈까지 탐내고만 있었다.
손자들의 재롱은 말 그대로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돈을 뜯어내기 위한 행동일 뿐이었다. 효자원이 한 행동은 그런 현실적인 기억들이 모여 재해석된 내용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힘겹게 살았던 할머니 두 아들을 잘 키워냈지만 막내 딸은 오빠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어린 나이에 공장에 들어가 돈을 벌어야 했던 어린 딸. 그 딸을 위해 남겨둔 것이 할머니가 살던 집이었다. 늦은 밤 병원을 찾은 딸 은숙을 보며 한없이 행복해 하는 할머니. 고생만 했던 딸은 그렇게 항상 오빠들에게 양보만 하다 암에 걸렸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 했지만 요양병원을 찾지 않던 딸이 갑자기 그녀 앞에 나타났다.
"다음에도 엄마 딸로 태어나 달라면 안 되겠어. 그때는 엄마가 한 번 해봤으니까 정말 정말 잘 해줄 수 있을 거 같아"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더 애틋한 딸에게 다시 자신의 딸로 태어나 달라는 할머니. 고생만 하고 엄마보다 먼저 간 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는 할머니의 오열은 우리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애틋함이다.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들에 대한 애틋함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시어머니 혜자가 추울까 봐 수면 양말을 챙겨간 며느리 정은은 서럽게 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손을 잡으며 이제 그만하면 됐다는 시어머니의 그 따뜻한 위로는 지독한 삶에 대한 고통을 모두 잊게 만들 정도였다. 친정도 없는 자신을 며느리를 맞아 미용 기술을 가르치고 힘들 때마다 따뜻하게 위로했던 시어머니는 친정 어머니나 다름없었다.
"그만해도 된다. 그만해도 된다" 어머니가 이제는 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언제나 며느리 편이라는 혜자의 위로에 정은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아들을 탓하지 못한 자신을 오히려 반성하며 며느리에 대한 사랑을 담은 혜자는 그렇게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미용실에서 실수를 하고 힘겨워할 때마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사다 준 붕어빵. 그 붕어빵이 생각나 사들고 간 병원에서 시어머니는 더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에게 손이 트지 않는 방법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시어머니.
혜자의 그런 모습을 보고 병원 복도에서 서럽게 우는 정은의 마음은 누가 이해하지 못할까? 이제 가장 소중한 것들마저 잊어가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마음은 그렇게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런 혜자가 마지막까지 잊지 못하고 찾은 지하실의 휠체어 할아버지는 그녀가 마지막까지 놓을 수 없는 기억 때문이었다.
<눈이 부시게>는 이제 마지막 한 회를 남겨두고 있다. 그 마지막이 갑작스러운 기적을 만들어낼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치매의 마지막에 다다른 혜자가 그 순간까지 놓지 못한 마지막 기억은 남편 준하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 마지막 이야기는 그래서 서럽게 시린 이야기라 할지라도 기대된다. 누구나 애틋해 하는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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