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폭력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광폭화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친구들끼리 싸우는 수준을 벗어났다. 여러 명이 한 명을 집단 구타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현재의 상황은 단순한 친구들끼리 다툼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거제에서 일어났던 사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절놀이'라는 말도 안 되는 놀이 문화를 들먹이며 가해자들은 억울하다고 외치고 있다. 잘못을 반성했지만 경찰에 신고가 된 이상 자신의 반성은 반성이 아니라 강요된 반성이라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룬 거제 학교 폭력의 핵심은 하나다. 폭력의 일상화와 두둔하는 어른들 문제다.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이 존재한다. 가해 학생들은 부모들과 함께 피해 학생 어머니가 운영하는 분식집을 찾아 사죄를 했고, 반성문도 작성했다. 그리고 화가 난 피해 학생 부모는 때려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아들을 집요하게 폭행한 가해자들을 때렸다.
자신의 아들을 괴롭힌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분풀이를 하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 못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 역시 폭력일 뿐이다. 하지만 더 기괴한 것은 아이들이 맞고 있는 현장에 있던 가해자 부모들이다. 그들이 자신의 아이들이 맞는 것을 보기만 한 이유는 경찰에 알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 학생 어머니의 분풀이로 모든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상황이 극적으로 변한 것은 가해 학생들이 고소를 당하면서부터다. 고소를 한 것은 당연히 피해 학생 측이다. 그렇게 학폭위가 열려 가해 학생 중 하나는 폭력 혐의로 강제 전학 조처가 내려졌다.
이 상황이 되자 가해 학생 측도 억울하다며 피해 학생 어머니를 고소했다. 자신들을 폭행했고, 거짓으로 진술서를 작성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취재진을 만난 가해 학생들과 부모들은 시종일관 억울하다는 주장만 했다. 피해자 측의 주장은 모두가 거짓이라며 항변했다.
피해자를 폭행한 적도 없고, 목을 조르는 등의 행위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저 친구들끼리 장난을 치는 수준이었고, 피해 학생도 자신에게 그런 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 피해 학생의 자세한 진술은 모두 꾸며낸 거짓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맞는 것을 보며 너무 마음이 아팠다는 한 아버지의 눈물은 이내 악어의 눈물로 드러났다.
증거도 목격자도 없다며 자신들은 억울하다 강변했던 가해 학생들의 주장과 달리, 그들의 가학 행위는 사실이었다. 교회 CCTV에 담긴 영상을 보면 가해 학생들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던 내용 자체가 거짓말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악의적으로 피해 학생의 목을 조르고 바닥에 쓰러트려 기절하는 장면이 모두 담겼다.
유도 전문가는 이 정도 압박으로 목을 조르면 순간적으로 기절할 수 있다고 했다. 피해 학생이 깨어난 후 벌떡 일어나 웃으며 걷는 과정은 장난이기 때문이 아니라, 상황이 만든 결과일 뿐이다. 결정적으로 목조림이 심해지자 가해 학생에게 그만하라고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들고 있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진 것도 모르고 기절했던 피해 학생은 일어나 갔다. 이 모든 상황을 보면 가해 학생들이 수시로 피해 학생 목을 졸라 기절 시키는 행위를 했었음을 알 수 있다. 녹취된 이들의 통화 내용만 봐도 악의적으로 여럿이 한 학생을 폭행해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무에타이를 배운 덩치가 큰 가해 학생이 왜소한 피해 학생이 원해서 스파링을 했다는 주장은 황당하기까지 했다. 무술을 배우지 않았으니 핸디캡을 주고 스파링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과 달랐다. 피해 학생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도망을 쳐도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한 사실이 목격자에 의해 진술되었으니 말이다.
이런 잔인한 폭력을 목격한 이는 너무 많았다. 피해 학생이 솔직하게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한 것은 현재와 같은 상황 때문이다.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피해 학생. 거제로 이사와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가해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렇게 그 아이는 낯선 곳에서 잔인한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 측에서 고소를 한 결정적 이유는 아이들이 함께 다니던 목사의 행동 때문이다. 가해 학생들의 편에 서서 피해 학생이 무조건 희생하라 강요하는 행위가 과연 정상일까? 용서를 구하지 않았지만 학폭위가 열리기 전에 피해 학생이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는 목사가 했다.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영장에서 물에 빠트린 채 숨도 쉬지 못하게 하는 폭력을 목격한 자가 피해자 어머니에게 한 말은 가관이다. 자신은 "진실보다 용서가 먼저라고 배웠다"는 말로 가해자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용서만 하면 그만이라는 가해자의 편에 선 교리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되묻고 싶을 정도다. 다수의 가해자의 편에 선 종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피해자 어머니의 고발은 그렇게 이뤄진 것이다. 인천 여중생 자살 사건 뒤에 숨겨진 성폭행 사건 역시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편에 선 사회가 문제였다.
잔인한 범죄는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이미 피해자는 사망했다. 경찰도 학교 교장도 모두 방관자다. 분명한 성폭행 사건이 있었고, 이로 인해 2차 피해를 받은 후 어린 아이는 더는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찰은 왜 죽음에 이르렀는지 보다는 살아있는 가해자의 편에 섰다.
학교 교장이라는 자는 취재진 앞에서 자신은 그저 교사라며 자리를 피하기 급급할 뿐이었다. 피해 학생의 담임은 사건의 중대성을 교장에게 알렸지만 외면했다. 만약 학교가 제대로 역할만 했다면 억울한 죽음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이 학교 생활을 한 피해자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담임 교사는 이 사건 후 공항장애로 휴직까지 한 상태다.
아이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것은 왜 마지막까지 아이를 도우려 했던 담임의 몫이 되어야 하는가? 아이의 죽음에 성폭행이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경찰의 주장을 과연 누가 믿을 수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 언니를 고소하겠다고 나서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어른들이 그리고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이 된다면 절대 이런 일은 벌어질 수 없다. 하지만 어른은 방관하고, 사회 시스템은 여전히 피해자의 편에 서지 않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피해는 온전히 그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문제 해결 의지가 없는 상황에서 학교 폭력은 절대 근절될 수 없다. 아무리 시스템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를 현장에서 이행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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