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롭고 재미있다. 한 편으로는 답답함과 뭔지 모를 미묘함을 자아내는 <너무 한낮의 연애>는 아련함까지 담아냈다. <KBS 드라마 스페셜 2018> 4번째 작품이 던지는 화두는 감정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변하고 변할 수 없는지에 대한 담담한 시선이 매력인 드라마였다.
사랑하죠 오늘도;
19년 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 그 먹먹함만 남긴 추억은 아름다웠을까?
대기업 사원인 필용(고준)은 성공적인 삶을 사는 듯했다. 승진도 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멋지게 이어질 것이란 생각과 달리, 필용의 삶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승진이 아니라 팀장에서 평사원이 되어 지하 시설관리부에 배치된 그는 퇴출 수순을 밟게 되었다.
한껏 들떴던 그는 갑작스러운 몰락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우연하게 첫사랑을 만나게 된다. 과거 잘 다니던 햄버거 집에 붙은 연극 포스터를 보는 순간 그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양희(최강희)가 학창시절부터 가지고 다니던 연극 대본에 적힌 제목이었기 때문이다.
양희를 다시 떠올린 것은 그의 처지가 궁색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난 19년 동안 잊고 지냈던 첫사랑이 한순간 들어오고 직접 보기 위해 찾아가는 행위는 그렇게 읽힐 수밖에 없는 이기심이니 말이다. 양희의 연극은 1인극이고 관객 참여극이다.
기존 연극 문법을 완벽하게 파괴해버린 이 연극은 기묘할 수밖에 없다. 양희 앞에 한 사람이 앉는다. 그게 전부다. 양희의 눈을 바라보며 과거로 돌아가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되는 이 연극은 가장 순수했던 시절로 안내하는 연극이었다. 그런 양희를 위협하는 존재는 잘 나간다는 평론가였다.
연극에 대한 제대로 된 평보다는 양희와 한 번 자는 것이 더 우선인 평론가의 노골적인 행위는 처량함을 더한다. 연극에 대한 몰이해에도 유능한 평론가로 알려진 자의 허상은 우리 일상에서도 너무 쉽게 발견되는 이중성이기도 하다.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허상의 전문가들이 너무 많으니 말이다.
19년 전 양희는 말수도 없는 아이였다. 학교에서 그녀는 이상한 아이라고 여겨지는 존재였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낡은 운동화에 티셔츠가 전부인 양희는 이성에게 관심을 받기 힘든 존재였다. 그래서 필용은 신기했다. 다른 아이와 너무 다른 양희가 사랑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뭔지 모를 감정이 돋아났다.
어학원에서 알게 되어 그렇게 연애라고 할 수 없는 만남을 이어가던 어느 날 양희는 필용에게 갑작스럽게 "사랑해요, 오늘은"이라는 고백을 한다. 항상 2천 원을 건네며 햄버거 데이트를 하던 날 받은 고백에 필용은 당황스러웠다. "선배, 좋아해요"도 아니다. 단순히 "사랑해요"도 아닌 '오늘은'이란 한시적 꼬리표가 붙은 사랑 고백이라니 그마저 기이했다.
양희의 이 엉뚱함이 필용에게는 사랑이었다. "사랑하죠, 오늘도" 다음날 질문에 양희가 했던 답변이다. 그렇게 매일 확인해야만 하는 사랑도 균열은 시작된다. 너무 볼품없는 행색에 가까이 접근하기도 꺼려하던 양희와 사귄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싫었던 필용의 이기심은 양희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친구 앞에서 자신을 숨기는 상대를 계속 사랑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 안 해요. 사랑"이라는 양희의 고백에 당황하는 필용은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없어졌어요. 아예"라는 양희의 말에 사랑은 한 번에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라 강변해 보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바라보는 필용과 양희는 너무 달랐다. 자신을 더는 사랑하지 않는단 말에 화가 난 필용은 한심한 속내를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치졸함의 극치를 보인 필용의 민낯은 더는 양희가 감정 소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다가올 정도였다.
자신의 본심이 아닌 욱하는 심정을 쏟아낸 감정은 열병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며칠을 아팠던 필용은 양희의 시골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본 양희 가족의 모습에 다시 한 번 화만 냈던 필용은 그렇게 완전히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무기력해 보이기만 하는 양희의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가족의 모습에 실망인지 모를 묘한 감정이 그를 압도했으니 말이다.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으니까. 비웃지 않으니까.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보라 구요"
사과를 한 필용에게 양희가 한 말이다. 그 말 속에 왜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지 모두 들어 있다. 부끄러워하고 비웃는 감정이 사랑일 수는 없다. 그런 감정의 소비로 인한 상처는 그렇게 깊은 자국을 남길 뿐이다. 돌아오는 길에 서럽게 우는 필용은 그 감정을 깨달았을까?
필용이 느낀 감정은 양희와 더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었다. 이후 그가 살아왔던 삶은 양희를 만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양희도 변하지 않았지만 필용도 변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변할 수 없어 몰락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19년이 지나 양희를 찾은 필용은 정말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그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이기심이 만든 몸부림일 뿐이었다. 사랑이라는 열병은 존재했지만 타인을 배려하는 사랑을 해보지 못한 자는 그 뒤늦은 깨달음에 울 수밖에 없다. 진정한 사랑을 모른 자는 외로울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카뮈의 <이방인>을 보는 듯한 감정을 많은 이들도 느꼈을 듯하다. 너무 한낮에 이뤄진 연애는 그렇게 민낯만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익어가지 못했다. 낮과 밤을 보낸 사랑이라면 보다 단단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설프고 설 익은 사랑은 그렇게 감정의 실체만 드러낸 채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자의 무료함을 강렬하고 심도 깊게 담아냈던 카뮈와 남과 여의 첫 사랑과 19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나 다시 그 감정을 다루는 방식은 다른 듯 유사하다. 그 지독할 정도로 밋밋해서 더욱 간절해지는 감정. 그 감정은 과연 허상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전형적인 속물 남성과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여성의 사랑이라는 감정. 그 쏟아내기 어려운 감정은 마침내 서로 앞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그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나며 그들의 19년 만의 만남도 영원히 이별로 이어지게 된다. 그 지독할 정도로 담담해서 섬뜩하기도 한 이들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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