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주총은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물론 이 한 번으로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장 대한항공에서 조양호 회장이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했지만 조 씨 일가의 지배는 여전히 이어진다. 최측근과 아들이 대표이사로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진그룹 회장직을 역임하고 있기 때문에 사내이사 연임 실패로 당장 큰 변화는 없다.
갑질로 사회적 지탄을 받은 자에 대한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 재벌가 갑질이 더는 존재할 수 없는 사회 구조를 만드는 것은 단순하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적합한 처벌을 받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재벌가는 더는 법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님을 이제는 알아야 한다.
"지난 2007년 3월 현대자동차 주주총회장이 웅성거렸습니다. "저는 현대차 진짜 주주 OOO입니다"한 손을 번쩍 들었던 열일곱 살의 소년. "일본 자동차 회사가 미국에서 위협적으로 로비를 강화하고 있다는데…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입니까?" "여기 현대차 직원들이 상당히 많은데 본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주총장에 동원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질문과 지적은 이어졌고 답변하던 회사의 부회장은 진땀을 흘렸다는 후문입니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예상치 못한 학생의 출현에 시선을 모았고, 당시 저도 제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 학생을 인터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았다" 주총장에 처음 참여해본 그의 한 줄 소회였습니다. 3월은 주주총회가 몰려있는 달이지요. 회사의 '실제 주인'인 주주들이 주요 안건을 분석하고 판단해서 결정하는 자리"
"'미세먼지 속 회의장 입장에만 3시간…' '삼성전자 주총…주요 안건 '박수 통과'에 소액주주들 항의' 그러나 그것은 교과서적인 정의였을 뿐, 우리의 기업 문화에서 실제 주인이 주인의 행세를 해본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대한항공 주주총회는 이변이었을까…"
손석희의 앵커브리핑의 주제는 '대한항공 주총'이었다. 당연하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변곡점이 될 수도 있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손 앵커는 12년 전 현대자동차 주총에서 벌어진 일을 상기시켰다. 열일곱 살 소년의 당돌함에 많은 이들은 당황했다고 한다. 너무 당연한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한 회사 측의 모습은 우리 사회 주총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주총은 주주들이 모여 회사의 모든 것을 논의하는 자리다. 하지만 지금껏 주총은 재벌가 지배 권력자들의 거수기 역할만 하는 그런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요식 행위로써 주총이 필요했을 뿐 주주들의 의견을 듣고 그들의 입장에서 회사가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자리는 아니었다는 의미다. '실제 주인'인 주주들은 존재하지 않는 주총이었다.
""조양호 사내이사 선임의 건은…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물론 당장의 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치진 못하겠지만 기업의 진짜 주인인 주주들이 던진 경고의 메시지는 분명해 보였습니다. "시민들을 두렵게 하는 것은 그들의 지나간 망언이 아니다. 앞으로 그들이 갖게 될 힘이다…" "상습적인 폭력을 저지르며, 국민을 미개한 존재로 보는 이들의 지배"- 손아람 < 세계를 만드는 방법 >"
"작가 손아람은 거듭된 갑질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들이 여전히… 또 앞으로도 손에 움켜쥐고 있을 권력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열일곱 살 소년이 '짜고 치는 고스톱판'이라고 정의 내린 경제 권력의 견고한 장벽. 그래서 오늘 일어난 이변 아닌 이변은 그 견고한 장벽을 허물 균열의 시작이며 이런 균열이야말로 이제는 스물아홉 청년이 되어있을 그 소년이 좀 더 합리적인 세상을 꿈꾸며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다는 것"
현직 회장이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했다. 그룹 지배자가 중요 사업체의 사내이사 연임이 안 되는 경우는 드문일이다. 다른 곳도 아닌 주총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가 부여될 수밖에 없다. 주주들의 힘으로 오너 리스크를 바로 잡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로 다가온다.
변화는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권력을 지니고 있다. 돈 권력은 정치, 사회, 법 등 모든 분야를 집어 삼킨 채 거대한 괴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 괴물들이 한 번의 상처로 무너질 것이라 보는 이들은 없다. 당장 국민연금이 반대 입장을 보였던 SK주총에서는 최태원 회장에 대한 지지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연금 사회주의로 몰아 가는 분위기는 황당하기만 하다. 그동안 자신들의 거수기 역할만 하던 국민연금이 제대로 일을 하니 사회주의라고 공격하는 그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빨갱이 전략'이 유효하다는 확신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생을 '레드 콤플렉스' 외에는 공격할 근거를 찾지 못하는 한심한 무리들에게 이성적인 세상은 불안으로 다가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