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먹하다. 왜 이제 30대인 그는 암에 지배를 당한 채 죽어가야만 했을까?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노점을 하면서 아들 하나를 키우기 위해 열심이었다. 아들 역시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했다. 그렇게 학교를 가고 로스쿨에 입학해 2년 반을 다녔다.
한 학기만 마치면 졸업이다. 변호사 시험만 치면 이제 어머니를 더 고생시킬 수도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지만 87년 생 송영균은 암의 지배를 받고 말았다. 32살 나이로 암 투병을 하다 세상과 작별을 해야만 했던 한 청년의 마지막 5개월 간의 기록이 <MBC스페셜-내가 죽는 날에는>에 담겼다.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그렇게 로스쿨에 입학해 좋은 변호사도 되고 싶었다. 홀어머니가 더는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아들의 마음은 애틋했다. 남편을 일찍 보낸 엄마는 10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노점을 지켜야 했다. 그렇게 거리에서 음식을 팔면서도 행복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아들의 고생도 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균 씨는 공부를 하다 배가 너무 아파 화장실에서 혈변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게 시작이었다. 암은 그렇게 젊은 영균 씨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2014년 처음 수술을 받으며 간의 80%를 제거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제거한 간에도 암 덩어리는 남아 있었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들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항문을 제거해야만 했다. 의사는 정자를 보관하라는 말도 했다. 그리고 성불구가 될 수도 있다는 말도 했다. 아주 빠른 시간 동안 쏟아지는 이 경고들과 함께 영균 씨는 간을 시작으로 폐까지 많은 것들을 수술로 드러내야만 했다.
대학 은사는 처음 영균 씨를 봤을 때를 회상했다. 커다란 몸짓에 빛나는 그를 좋아했다. 비스듬히 앉은 그를 보며 키가 너무 커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아 제대로 듣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고 한다. 그렇게 최선을 다한 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의 마음은 아프기만 하다.
영균 씨는 사진을 찍는 선배에게 '영정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냥 그런 사진이 아닌 자신이 떠난 후 자신을 기억해 줄 이들을 위한 사진이었다.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동네를 찾아 일상을 찍는 그 모든 행위가 영균 씨에게는 세상에 이별을 하는 과정이었다.
반년 남은 로스쿨을 마치기는 힘들었지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어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철학, 죽을 때까지 읽기'라는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그렇게 사람들과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것이 영균 씨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 마지막 남은 삶을 위한 최선의 배려일 것이다.
영균 씨는 어머니와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일만 했던 어머니. 쉬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매일 나가 일을 해야 했던 어머니와 함께 영균 씨는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자신을 위함이 아닌 남겨질 어머니를 위한 여행이었다.
어머니가 좋은 곳에 가서 맛있는 것 많이 먹기 바라는 아들은 가장 멋진 옷과 구두를 신었다. 골반이 너무 아파 걷기도 힘든 그에게 구두는 최악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여행에서 어머니가 멋진 아들과 행복한 기억을 남길 수 있기를 바라는 아들의 마음이었다.
처음 가본 부산 해운대. 바닷가를 거닐고 함께 사진을 찍는 너무 평범한 그 모습이 너무 좋은 모자의 하루는 그렇게 아름다웠다. 아름답게 핀 꽃보다 아들과 함께 찍는 사진이 훨씬 좋다며 웃는 어머니 역시 이 여행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그런 아들과 마지막 여행을 함께 하는 어머니는 담담하게 그 아픔을 숨겨야 했다.
2018년 12월 28일 영균 씨는 지인들과 함께 '마지막 파티'를 준비했다. 직접 음식을 만들고 그렇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며 행복해 하는행복해하는 영균 씨와 지인들에게 그 날은 너무 아름다웠다. 다시 올 수 없는 오직 단 하루의 만찬은 그렇게 흘러갔다. 맞춤 양복을 입고 너무 행복해하는 영균 씨는 그렇게 열심히 살고 싶었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영균 씨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것은 독서모임이었다. 외출도 힘든 상황에서 영균 씨는 집에서 독서모임을 진행했다. 몸이 이 지경인데 독서 모임을 왜 하냐는 어머니의 타박에, 그거라도 하고 싶은 아들의 마음을 모를리는 없었을 것이다. 아픔을 대신할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은 그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2019년 끝까지 살게 해주세요"
독서모임 멤버들이 준비한 생일 케이크에 환하게 웃던 영균 씨. 촛불을 끄기 전 소원을 빌라는 멤버들의 요구에 영균 씨가 한 말이다.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 영균 씨에게는 가장 소중한 소원이었다. 제발 올 해가 다 가는 날까지 살아 있기를 바라는 영균 씨의 마음은 하늘은 외면했다.
2019년 3월 9일. 지독한 고통에 힘겨워하던 영균 씨는 그렇게 구급차에 실려갔다. 병원으로 실려간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2019년 한 해를 채우고 싶다는 바람은 그렇게 봄 꽃이 제대로 피기도 전에 지고 말았다. 무심한 세상은 그렇게 잔인하다. 아무런 일도 없듯 일상은 반복되니 말이다.
영균 씨는 자신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했다. 기존 장례식과 다른 추모회를 열어달라고 했다.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햇살 좋은 봄날 자신을 추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친구들은 모였고, 짧지만 최선을 다해 살았던 영균을 추모했다.
그를 기억하는 사진과 글,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영상을 보면서 그를 마음에 새기는 친구들의 모습은 강렬함으로 다가왔다. 남겨진 이들에게 그 추모회는 어떤 의미였을까? 우리가 사는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원했던 날이다. 우린 그 오늘을 얼마나 충실하게 살았나?
모두에게 어제는 존재하지만 오늘은 장담할 수 없다. 그 소중한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지 영균 씨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민했다. 그 간절했던 오늘을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갈 것인지.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어쩌면 그게 남겨진 자들이 해야만 하는 일들일 것이다. 87년생 송영균의 마지막 생일 그토록 원했던 삶. 이제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