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되면 나라 망한다” 전략이 먹히지 않았던 이유… ‘내 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네 편’이었던 클린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 45대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구호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과거의 영광은 대체 언제일까?
미국 토크쇼 <The Daily Show>가 인터뷰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답변은 산만하기 그지없었다. 미국이 가장 위대했던 순간으로 건국 당시를 꼽은 한 트럼프 지지자는 노예제도에 대해 말을 더듬었고, 미국이 2차 대전에서 이겼던 시절을 꼽은 지지자 역시 당시의 인종분리정책과 성차별에 대해 얼버무렸다. 그들은 한결 같이 미국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라며 발끈했다. 한 여성 지지자는 이렇게 답했다.
인터뷰어: 미국이 언제 위대했어요?
트럼프 지지자: 미국은 언제나 위대했죠.
인터뷰어: 그럼 우리는 왜 과거로 돌아가려는 거죠?
트럼프 지지자 우리는 과거로 가는 게 아니라, 미래를 향해 가는 거예요!
트럼프에 표를 던진 미국인의 심리가 여기에 다 숨어있다. 위에 소개한 트럼프 지지자의 발언에는 미국인의 두 가지 심리가 드러난다. 첫째, 미국은 언제나 위대했고 앞으로도 위대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자존감. 둘째, 과거야 어쨌든 좋으니 앞으로 밝고 ‘위대한’ 미래를 위해 판을 바꾸자는 열망이다.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미국인에게는 자랑스러운 조국을 만들기 위해 후보의 개인적 흠결 정도는 별일 아니라는 자존감과 우월감이 있었다. 그리고 위대한 미래를 위해 변화를 만들자는 열정이 있었다.
사람들은 트럼프가 극우 보수 백인만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백인 남성의 높은 지지(63%)를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성 42%가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고 라틴계와 아시안 29%가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CNN 출구 조사 기준). 극우 보수 백인이 만들어 준 승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클린턴의 패배를 ‘똑똑한 여성이 머리 위에 앉는 걸 두고 볼 수 없는’ 남성 유권자와 ‘유색 인종 청소를 원하는’ 극우파 백인 유권자의 공작이라고 해석하는 게 2% 부족한 이유다.
힐러리 대 트럼프의 대결을 마치 선(善)과 악(惡)의 대결 구도처럼 인식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인들은 팍팍한 삶이 나아지기를 원했다. 미국이 위대했던 순간을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다 해도 ‘지금 이대로는 아니다’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그들에게 트럼프가 악한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다. 성추행하듯 자꾸 딸 이방카의 골반 춤에 손을 올려도, 장애가 있는 리포터를 흉내 내 웃음거리로 만들어도, 무슬림을 식별할 수 있도록 신분증에 표시하자는 경악스런 제안을 해도 그가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애초에 미국 유권자들이 이번 대선을 선과 악의 경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악을 선택하기 위해 3시간씩 줄 서는 사람은 없다
선거 기간 동안 클린턴의 전략은 ‘트럼프가 되면 나라가 망한다.’였다. 클린턴 캠프는 트럼프의 여성비하 발언, 인종차별 발언을 모아놓은 텔레비전 광고를 연신 내보냈다. 우리 아이들을 저런 대통령에게 맡길 수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차악인 자신을 선택해달라는 클린턴의 현실적인 호소에 공감하지 않았다. 대중은 나라를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트럼프의 메시지에 매력을 느꼈다. 실현 가능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 기득권을 해체하고 지금보다 나은, 미국 중심의 미래를 공언했다. 그의 연설은 언제나 부패한 정치와 불공정한 언론을 갈아엎겠다는 약속으로 끝났다.
반면 클린턴은 자신을 선택하면 최악의 경우를 모면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맞섰다. 말하자면 ‘잘해야 본전’인 셈이다. 도무지 흥이 나지 않는 제안이다. 표를 던지기 위해 투표소에서 여러 시간 줄을 서는 게 일상적인 미국에서, 차악(클린턴)을 선택하기 위해 세 시간씩 줄을 서는 사람은 없었다. ‘위대한 미국’을 꿈꾸는 유권자의 세 시간은 즐거웠겠지만, ‘현상 유지’를 위해 표를 던지러 간 유권자의 세 시간은 훨씬 고달팠을 것이다.
유권자가 능동적으로 표를 던지게 하는 ‘긍정 요인’은 트럼프 쪽에 더 많았다. 우리는 트럼프가 유색인종 비하 발언을 일삼았는데도 이들 일부가 트럼프에 표를 던진 걸 의아하게 여긴다. 알고 보면 트럼프는 유색인종에게도 ‘긍정 요인’을 어필했다. “더 잃을 게 뭐가 있나(What have you got to lose)?”라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트럼프는 선거 유세장에서 인종차별에 좌절하고 경제적 불이익에 시달리는 유색인종 유권자에게 자신을 선택하라고 호소했다. 진보고 보수고, 기성 정치인이 당신들에게 해준 게 뭐가 있냐면서 ‘더 잃을 것도 없는 마당에’ 자신을 뽑으라는 논리를 폈다. 이 발언이 유색인종 유권자의 표를 얼마나 가져왔는지 계산할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표를 던질 ‘긍정 요인’을 만들어 내는 트럼프만의 재능을 보여주는 예시임은 틀림없다.
보수 클린턴 vs 진보 트럼프?
미국 대선을 분석할 때마다 등장하는 ‘피보팅(Pivoting)’이라는 전략이 있다. 미국 대선은 당내 후보 압축을 위한 경선 과정과 이후 당을 대표하는 후보끼리 경쟁하는 대선 과정으로 나뉜다. 당내 후보끼리 경쟁할 때엔 각 당에 존재하는 열성 지지자의 표를 얻기 위해 정치적 색채가 짙은 어젠다를 내놓는다. 그리고 당의 후보로 뽑힌 이후엔 국민 전체의 표를 확보하기 위해 중도 노선으로 논조를 바꾸는 전략을 쓴다. 이와 같은 ‘중도점으로 회귀’는 피보팅 전략의 핵심이다.
클린턴도 피보팅 전략을 썼다. 당내 후보 경선에서 샌더스 후보의 강력한 사회적 민주주의 정책이 인기를 끌었을 당시, 클린턴 후보는 자신이 더욱 진보적 후보라는 억지스러운 발언까지 하며 눈길을 끌었다. 진보 유권자의 마음을 얻으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경선 승리 후엔 자연스레 피보팅을 시작했다. 선거가 계속되면서 클린턴 캠프는 샌더스식 진보 정책을 조금씩 누그러트렸고, 급기야 보수 공화당 유권자들에게 “사려 깊은 보수”라면 자신을 선택하라고 호소했다. 보수파의 아이콘인 부시 가문의 정치 후원자들을 섭외하려는 노력도 이어졌다.
클린턴이 이처럼 ‘우향우’를 외치고 달려가자, 진보 유권자와 젊은 유권자들이 거세게 불만을 표현했다. 그들은 최저임금 15달러, 공립대학 무상교육, 기후변화에 적극적인 대처와 석유 시추(fracking) 중단 등 샌더스의 핵심 공약 이수를 요구했지만 클린턴 측은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클린턴 측이 샌더스 후보 지지층을 흡수하기보다 공화당 지지층을 끌고 오려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속이 탄 진보 유권자들은 부통령이라도 진보적인 인물을 임명하기 바랐다. 엘리자베스 워렌 상원의원의 이름이 물망에 올랐다. 하버드 로스쿨 법학교수 출신인 워렌 상원의원은 소비자금융보호국(U.S. Consumer Financial Protection Bureau) 창설의 공신으로, 샌더스만큼이나 안티가 없는 민주당 인기스타다. 진보 유권자들은 내심 워렌 상원의원을 부통령으로 임명한다면 기꺼이 클린턴에게 표를 던지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클린턴은 난데없이 변호사 출신 팀 케인 상원의원을 데려왔다. 그는 뉴욕타임스가 “중도주의자(centrist)”라고 평한, 클린턴만큼이나 진보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샌더스 지지층 흡수에 실패한 클린턴은 인디펜던트(당 소속이 없는 유권자) 중에서도 42%의 지지율밖에 얻지 못했다. 산토끼를 잡으려다 집토끼도 놓친 격이다.
트럼프도 피보팅 전략을 썼을까? 아니다. 트럼프는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일부 정책은 클린턴보다 훨씬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대학 등록금 면제 대신 투잡이나 저금리 학자금대출을 언급한 클린턴과는 달리, 그는 학생들이 더 이상 학자금을 빚지지 않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물론 실현 가능성은 또 다른 이야기다.
그는 또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던 클린턴과 달리, 미국이 ‘세계의 경찰관’이 될 필요는 없다며 각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력의 철수를 주장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방위비를 가장 많이 쓰는 나라다. 트럼프는 전쟁을 그만두고 그 돈을 인프라에 투자하자고 말한다. 전형적인 진보 어젠다이지만, 삶이 팍팍한 미국 보수 중산층은 환호했다. 표현은 투박했을지언정, 그의 진보적 정책이 미국의 보수층에게 먹혀든 것이다. 보수 안에서 진보를 찾아낸 트럼프가 승리했다.
트럼프 뽑은 미국인들을 동정할 수 없는 이유
트럼프의 당선 소식을 듣고 미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트럼프를 찍은 절반의 미국인들은 희망에 차있다. 말을 바꾸지 않고도 대선 경쟁에서 승리를 거둔 대통령이 등장했다. 정확한 시기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좋았던 그 시절’을 다시 만들어 주겠다니 기대를 하고 있다. 더 이상은 다른 나라의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는 자랑스러운 조국이 온단다.
유권자는 ‘국민’이라는 이익집단을 위해 싸울 정치인을 원한다. 트럼프를 뽑은 유권자의 대부분은 노예제도의 부활이나 무슬림 학살을 꿈꾸는 증오에 찬 미국인이 아니다. 자기가 아파하는 이유를 알아주고, 자기를 위해 싸워줄 ‘내 편’을 위해 표를 던졌다. 그들은 지금 ‘내 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네 편’이었던 클린턴의 진보 지지층보다 훨씬 행복하다.
오늘, 적어도 미국인 중 절반은 희망찬 아침을 맞았을 것이다. 우리가 나서서 미국인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