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하기엔 너무 가난하고 죽기엔 너무 젊다. 기본 생계조차 힘든 요즘 노년층 곤경 반영
RV 타고 떠돌던 돌로레스 사막 위 한 줌의 재로
길 위의 은퇴생활 고달팠지만 설렜던 긴 여정의 끝
누구나 다 사막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너무 뜨겁고 너무 황량해서다. 그러나 돌로레스 웨스트폴은 사막을 사랑했다. 그는 오래전 사막에 함께 갔었던 동생에게 말했었다.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사막에 뿌려 줘… 동생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이달 초, 동생 메리 앤 호이는 네바다-캘리포니아 접경지대 인근의 사막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돌로레스의 길고 고달팠던, 그러나 늘 설렜던 생의 흔적은 그녀 자신이 택한 황량하지만 아름다운 종착지에서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뉴욕 테마공원에서의 마지막 날, 돌로레스(왼쪽)가 서머잡을 끝낸 틴에이저 ‘동료들’과 서로의 환송 모임을 즐기고 있다. 희망 찬 내일을 가진 젊은이들은 집과 학교로 돌아가고, 인생의 황혼기에 선 돌로레스는 다시 길 위의 삶을 떠날 것이다
은행 비서, 박물관 큐레이터, 실내장식 컨설턴트 등으로 일했던 돌로레스는 은퇴 연령이 되었을 때 자신도 요즘 수많은 미국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곤경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 월 190달러의 연금과 1,200달러의 소셜시큐리티 연금만으로는 기본 생계가 힘들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험을 시작했다. 스스로 택한 것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70대의 삶을 ‘빅 풋(Big Foot)’이라고 이름 붙인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 RV(레저용 차량)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하며 살기로 한 것이다.
그 후 7년 동안 돌로레스는 ‘빅 훗’을 몰고 33개주를 떠돌며 온갖 일로 생계를 해결했다.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사무일도 보았고 세일즈 레이디, 리조트의 안내 데스크, 동굴 투어 가이드 등 무슨 일이든 주어지는 대로 했다.
“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고 싶었어요. 하고 싶어도 못 할 날이 올 때까지는…”이라고 돌로레스는 말했다.
LA타임스의 존 글리오나 기자와 프랜신 오르 사진기자가 취재했던 그녀의 스토리는 수많은 미국인들이 65세가 지나서도 은퇴를 늦춰야 하는 현실을 아프게,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
“은퇴하기엔 너무 가난하고 죽기엔 너무 젊다”는 말에 수많은 시니어들이 공감하듯이 55세 이상 미국인의 3분의 1은 연금도, 저축도 없으며 중간 연소득은 1만9,000 달러에 불과하다.
2016년 1월29일 LA타임스에 보도된 돌로레스의 스토리는 많은 독자들의 마음에 가 닿았다. 언제나 유머를 잃지 않고 활기찬 결단력으로 역경을 이겨내는 돌로레스 자체가 주는 호감과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5피트 1인치 키에 탭 댄싱 틴에이저처럼 스스로 잘 관리해온 우아한 댄서의 몸매를 가진 돌로레스는 낙관적일 뿐 아니라 의지도 강했다”고 글리오나 기자는 쓰고 있다.
휴스턴의 한 독자가 돌로레스를 위해 개설한 온라인 모금사이트 고우펀드미 어카운트에는 2만 달러 이상의 성금이 들어 왔다. 개인 체크로도 수천 달러가 답지했으며 조지아의 한 독자는 “들로레스가 애틀랜타에 온다면 무료 음식과 무료 주차장과 ‘빅 풋’의 수리비까지 다 부담하겠다.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돕고 싶어한다”고 이메일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 기사로 인해 돌로레스는 2015년 봄 뉴욕의 테마파크에서 시간당 9달러를 받는 임시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어린이 라이드 관리였는데 그나마 가을까지였다.
돈 걱정은 그칠 새가 없었다. “난 정말 우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고 그녀는 일기에 적고 있다. 300달러짜리 속도위반 티켓을 받은 날이었다. “5월 한 달 내내 일해도 300달러를 못 벌 것이다. 절반으로 깎아준다 해도 내 한 달 식품비보다 많은 돈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다행히 그녀의 사정을 이해한 판사가 벌금을 150달러로 깎아주었고 돌로레스는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어쨌든 그 벌금을 갚을 수 있었다.
테마 파크에서의 일도 쉽지는 않았다. 꼬마 손님이 조금만 미끄러져도 극성 엄마가 달려와 소리를 질러댔다. “시간당 7달러 받는 초라한 늙은이에겐 ‘라이프’라는 게 없는 것처럼 무시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녀는 그냥 떨쳐 버린다.
여름이 끝날 무렵 치과에 가야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동시에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빌딩 투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둘 다 각각 100달러가 드는 일이었다.
돌로레스는 프랭트 로이드 라이트를 택했다.
“아무리 하잖게 보여도 무언가 즐거운 일을 한다는 것은 영혼의 양식이 되어준다”고 그녀는 말했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선 때로는 스스로에게 기쁨을 주어야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산다는 게 너무 고역이니까요”돌로레스는 남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구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독자들의 성금 답지에 깜짝 놀랐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 읽고 싶어 한다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한 그녀는 몇 주일에 걸쳐 모든 편지와 이메일에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페니를 따지지 않고 큰 걱정 없이 장을 볼 수 있었다.
지난 가을 돌로레스는 뉴욕에서 플로리다로 갈 예정이었다. 그곳에 일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 직전, 80세 생일이 지난 며칠 후 그녀는 가벼운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버클리에서 날아온 동생은 돌로레스의 말이 어눌해진 것을 발견했다.
지난 몇 년 돌로레스의 유일한 ‘집’이었던 RV ‘빅 풋‘
‘빅 풋’이 주차된 외딴 시골 길가로 어렵게 찾아온 앰뷸런스에 실려 입원했다 퇴워한 돌로레스를 동생들은 캘리포니아로 데려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낡은 ‘빅 풋’에게도, 늙은 돌로레스에게도 대륙횡단은 무리였다.
정든 ‘빅 풋’을 친절한 간호사의 집에 맡겨놓고 비행기에 올랐던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다시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로 옮겨졌고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 12월 말 돌로레스는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소원대로 유해를 사막에 뿌리던 날, 동생 메리 앤 호이의 가족과 함께 돌로레스의 마지막 길을 전송한 것은 그녀의 스토리를 보도했던 두 기자였다. 젊은 시절 돌로레스가 즐겨 찾았던 모래사막에 서서 “돌로레스!” “돌로레스!”를 외치며 그들은 한 줌의 재로 변한 그녀의 80년 생을 바람에 날려 보냈다.